믿음에 관한 회고

2024. 6. 1. 04:11일상

저는 평소에 고민이 많은 청년이었습니다. 고민이 무엇이냐고요? 제게 고민이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, 아마 해가 지도록 이야기할 수 있을 겁니다. 왜냐하면 제 고민은 단순히 어떤 것을 먹고, 입고, 자고를 떠난 이야기라서요. 하루는 ‘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’, 또 하루는 ‘제 존재 이유가 무엇인지’와 같이, 언뜻보기엔 쓸모 없어보이는 심오한 고민에 빠지곤 합니다.

제 취미는 독서입니다. 어쩌면, 이 취미가 제 엉뚱한 고민을 한 층 더 이끌었을지도 모르겠네요. 특히 과학서를 많이 읽는 저는 우주의 기원, 인류의 운명과 같은 거대한 주제에 관심을 두었습니다. 하지만 스스로 여러 생각을 해도 만족스러운 답은, 늘 내리지 못했습니다.

 

하루는 이러한 생각이 들었습니다. “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통일되지 않아보인다.” 누군가는 이 생각을 들으면 의아해할 수 있겠습니다만, 제게는 중요한 질문입니다. 하루하루를 살아가며 불규칙한, 타인이 만든 규칙, 해석에 저는, 얽매어 있었습니다. — 공학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인간의 ‘시스템’ 속에서 살아간다는 말이 되겠지요 — 어떤 사건이든, 즉, 밥을 먹든, 누군가와 다투든, 길가던 비둘기를 바라보든, 저는 어떠한 시각으로 이들을 봐야하는지 몰랐던 것입니다.

숙고 도중, 문득, ‘세계적인 과학자들 중에는 종교를 가진 사람이 많다’는 말이 떠올랐습니다. 사실, 당시 이 말이 왜 떠오르게 되었는지는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. 아마 세계적인 과학자들이 그렇게나 학문적 진리를 탐구함에도, 고뇌에 빠져 있는 모습이 연상되어서 그렇지 않았나 싶습니다. 채플 강의 때 기독교에 관심이 있는 학생은 교목실을 찾으면 된다는 말이 기억나, 곧 한경직 기념관으로 발을 옮겼습니다.

 

비록 종교, 기독교에 전혀 관계가 없던 저였으나, 전도사님께서는 저를 따뜻하게 맞아주셨습니다. 저는 간단한 제 소개를 드렸습니다. 제가 그곳에 가게 된 계기와 제 고뇌,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, 제 내면을 꺼내어 보여드렸습니다. 이에, 전도사님께서는 제게 말씀을 하셨습니다. 저는 대강 이렇게 기억합니다. ‘진리’라는 것이 있다. 그것이 곧 마음의 평화와 기쁨을 줄 것이다.

 

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에 조금 당황하고 부담을 가지긴 했습니다. 생각보다, 공학도인 제게는 이 세계의 법칙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했나 봅니다. 그런 생각이 들었을지언정, 저는 전도사님의 기도를 듣고선, 성경 이해 공부 약속을 잡았습니다. 어쩌면 그 약속이 지금의 저를 인도하시게 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.

성경 공부는 몇 주간 걸쳐 이루어졌습니다.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, 죄란 무엇인가,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알게 되었습니다. 말씀을 들으면서 점차 제 의아해하던 태도가 옅어져 갔습니다. 전도사님의 말씀은 늘 흥미로웠지만, 믿음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더라고요.

 

그러나 저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을 읽고 제 안의 무언가를 느꼈습니다.

“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,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입니다. 내가 지금 내 몸 안에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셔서, 나를 구하시려고 자기 몸을 바치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.”

온 몸에서 전율이 느껴지고, 눈물이 날 듯, 또 안 날 듯 했습니다. 곧 지금까지 제가 살아오던 세상에 대해, 생각하던 고민들에 대해 퍼즐이 맞추어지고 있었습니다. 처음 전도사님을 뵈었을 때 하신 그 말씀,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. 그 뜻을 이제 알 듯합니다. 제 마음에도 기쁨과 평화가 찾아온듯 합니다.